손학규 퇴진거부 선언 프로필 학력
본문 바로가기

뉴스

손학규 퇴진거부 선언 프로필 학력

반응형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바른미래당에는 희망이 있다. 자유한국당과 통합하겠다는 생각은 버리라”며“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심판과 자유한국당에 대한 국민의 절망이 중간지대를 크게 열어놓을 것이고 바른미래당에 민심이 쏠릴 것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손학규 당대표는 이어 “안철수 대표님, 유승민 대표님 이제 싸우지 말고 함께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손학규와 안철수,유승민이 함께 화합해서 앞장선다면, 다음 총선은 우리의 바른미래당의 승리가 될 것이 확실하다” 주장 했습니다.​



손학규는 1948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아버지 손병화와 어머니 양현자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믄데요. 아버지는 교사로 생활하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교장으로 승진했지만, 그가 4살 되던 해인 1950년 1월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손학규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네요.
손학규는 1962년 경기고에 입학하여 3학년 무렵에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는데요. 1965년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습니다. 투쟁이 끝난 뒤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대학 2학년 무렵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 정학을 받은바 있습니다.
무기 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다시 무기 정학을 받았구요.연이어 무기 정학을 받은 손학규는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복학한 그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1969년 손학규는 육군에 입대(군번 61006472)하여 1972년에 병장 만기 전역하는데요. 군대에서 제대한 손학규는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던 손학규는 한국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진보 기독교 단체 NCCK의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빈민선교운동에 투신하기도 합니다.
해방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전태일로부터 충격을 받은 한국의 에큐메니컬운동은 도시산업선교를 통하여 노동자와 빈민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했으며,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같이 생활하던 손학규는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됩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민주세력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유신독재체제는 박형규, 김관석, 권호경 목사 등을 구속시켰고 손학규를 검거하기 위해 현상금 200만 원에 2계급 특진을 걸리는 등 손학규는 2년 동안 숨어 살며 원주의 사과 과수원, 서울의 철공소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손학규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는데요 이후 기독교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손학규는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민주화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최성묵 목사 등을 만나 사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수사당국에 검거되고 맙니다. 김해 보안대로 연행되어 48시간을 무작정 두들겨 맞고 문초를 당하던 손학규는 유신독재체제가 붕괴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답니다.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봄에 손학규는 WCC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서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나게됩니다. 1987년에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손학규는 5공 말기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하게 됩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에서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교수를 역임한바 있고 교수 시절 동안 손학규는 진보적인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치며 최장집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한국 사회의 미래에 관하여 토론하기도 합니다.

재야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손학규는 1993년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게되는데요. 이후 보궐 선거에서 경기도 광명시에서 당선되며 제14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제15대 총선에서도 신한국당 소속으로 승리해 재선에 성공하게 되죠. 1996년 11월에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답니다. 당시로서는 최연소 장관 기록이었으며, 1997년 8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손학규는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2년에는 민선 3기 경기도지사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2007년 3월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는 2007년 8월 민주평화계의 대통합을 이루어 내고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합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정동영에게 패해 2위로 낙선하고 말죠.
2008년 1월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 손학규는 민주당과 통합을 성사시켜 단일 야당 통합민주당을 출범시켰고 이후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당을 이끌었으나 299석 중 81석을 얻는 데 그치자 7월 6일 통합민주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며 강원도 춘천으로 떠났습니다.

2010년 8월 15일, 춘천을 떠나며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시혜적 복지, 잔여적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강조했으며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이 추구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복지사회로서 공동체주의와 보편적 복지를 기본 이념으로 할 것"이라며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2010년 10월 3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성과 무상복지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고 당대표로 선출되었는데요. 민주당 대표가 된 손학규는 2010년 12월 8일부터 12월 28일까지 전국을 돌며 민주대장정을 전개했으며, 2011년 1월 3일부터 다시 전국을 돌며 시민들의 건의와 주장을 경청하고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노선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희망대장정을 전개하기도 합니다.​



2011년 10월 4일,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운 후보 박영선 의원이 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하자 손학규 대표는 책임을 지고 사퇴 선언을 하게되는데여. 이때 박영선 등 다수 민주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하루만에 대표직 사퇴를 철회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손학규는 2012년 6월 14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 하는요. 그러나 민주통합당 국민 참여 경선 결과 손학규는 문재인에게 패하여, 후보로 선출되지 못했죠 이후 문재인이 대선에서 낙선하게 됩니다.

손학규는 2018년 바른미래당 대표에 당선되었고 당대표 임기는 2020년 9월 1일까지입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프로필
출생일 1948년 1월 2일 (71세)
출생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손학규 학력
1959년 서울매동국민학교 졸업
1962년 경기중학교 졸업
196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9년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1982년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1987년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손학규 경력
1977년~197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
1986년~1987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1988년~1990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1993년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2년~1993년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1993년~1996년 제14대 국회의원
1996년~2000년 제15대 국회의원
1996년~1997년 8월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
2000년~2002년 5월 제16대 국회의원
2002년~2006년 6월 민선 3기 경기도지사
2007년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
2008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2008년 2월 통합민주당 공동대표
2010년 10월 민주당 대표
2011년~2012년 제18대 국회의원
2012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2017년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
2017년 국민의당 상임고문
2017년 제19대 대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상임선거대책위원장
2018년 바른미래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
2018년 바른미래당 상임고문
2018년 9월 ~ 바른미래당 대표

반응형